석등[石燈]
사원(寺院) 경내나, 능묘 ·정원 등에 불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두는 등기(燈器).
능묘 앞에 두는 것을 장명등(長明燈)이라 하며, 석등류는 통틀어 석등롱(石燈籠)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석등은 다른 대부분의 석조물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가람배치양식에 따른 한 구조물로서 전래되어 등기로서의 기능과 사원 공간의 첨경물(添景物)로서의 기능을 함께 발전시켜왔다. 그 최고(最古)의 예는 백제 때에 건립한 전북 익산시(益山市)의 미륵사지(彌勒寺址) 석등에서 볼 수 있다. 이 석등은 팔각(八角)의 화사석(火舍石:點燈하는 부분)만 남아 있어 삼국시대의 석등양식은 고찰할 자료가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건립된 석등의 기본양식은 하대석(下臺石) 위에 간주(竿柱:中臺石)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상대석(上臺石)을 놓아 화사석을 받치고 그 위를 옥개석(屋蓋石)으로 덮어 평면이 8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석등은 이와 같은 8각의 기본형이 주류를 이루면서 내려오다가 8각의 4면에 보살상이나 사천왕상을 조각하는 등 시대적 ·지역적 특징을 보이면서 발전하여왔다.
석등(石燈)
1)팔각형 석등(八角形 石燈) 방형(方形) 혹은 팔각형의 지대석(地臺石)위에 8각의 복연석(覆蓮石)(연꽃을 덮어 높은 모양)을 얹어 그 위에 8각의 긴 간주를 세웠으며 다시 8각의 화사석을 받치기 위하여 8각의 앙련석(仰蓮石)(연꽃이 하늘을 보고 활짝 피어있는 모습)을 얹었고, 4방으로 화창이 뚤린 8각 의 화사석위에는 8각의 옥개석, 옥개석 정상에는 보주를 엊은 형상을 취한다.
2>고려시대 : 두마리가 서있는 것이 아니라 쭈그린 자세로 앉아 있고 입모습도 같으며 사자가 가장자리의 일부분만 받치고 있다.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282호)
3>조선시대 : 한마리의 사자가 엎드려 있고 그 등위로 간주가 세워져 있다.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 윤탑앞 사자석등(보물656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을 탑파라 하며 고승대덕을 비롯하여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조물을 부도라 칭한다. 부도는 신라말기 선종의 유행으로 각 선문의 제자들이 일계보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조사(祖師)를 숭배하며 조사가 설법한 내용이나 교훈 등을 어록으로 남기고, 입적 뒤에는 후세에 길이 보존될 조형물을 남기려는 뜻에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선사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장골처의 역할로 출현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건립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부도는 염거화상탑(884년)으로 석조부도 양식의 시원이 되고 있다.
등이라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이를 지혜에 비유합니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12호), 보림사 석등(국보44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103호) 등 5점이 국보로 지정된 석등이며 모두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되었습니다. 실상사는 남원군 산내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입니다. 실상사 석등입니다..
이 석등은 불을 켜는 화사석(火舍石: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불을 켜는 돌)을 중심으로 바닥에 3단의 받침을 놓고, 위에는 지붕돌을 얹었습니다. 8각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 측면마다 안상(眼象)을 음각하였으며 상면(上面)에는 겹잎[複葉] 8판(瓣)의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을 배치하였고, 합각(合角)의 판단(瓣端)에는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을 둥글게 장식하였습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화사석(火舍石: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불을 켜는 돌)을 중심으로 밑에는 받침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이 땅 속에 묻혀 있습니다. 8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복련대(覆蓮臺)가 마련되었고 큼직한 단엽(單葉) 8판(瓣)의 복련 안에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측면에는 16구의 안상(眼象)이 돌려 있습니다.
꼭~~ 챙겨서 보시기 바랍니다.
기타..지리산에 있는 쌍계사와 연곡사도 문화재 기행 코스에 넣으시면 좋습니다.. 쌍계사에는 국보 47호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있고 연곡사에는 국보 제53호인 동부도(東浮屠)와 국보 제54호인 북부도가 있습니다.
1.석등의 의의
우리 나라의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불상과 탑은 신앙을 위한 장식적인 의식물이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신앙 그 자체로서의 조각품이다. 불상과 탑에 비하면 석등은 그에 부수되는 것이며 다분히 건축적인 성격을 띤다. 이 건축물은 간결한 조명 시설물로서 寺院 宮闕 및 私家의 정원을 장식하는 시설물이기도 하다. 이는 수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우리 나라의 석등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자료가 제시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庭園文化를 발달시킨 일본에 있어서 아스카시대와 나라시대의 미술, 공예품 혹은 건축 등에 미루어 보면 우리 나라의 석등의 기원 또한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 시대에 있어 특히 백제지역에서 발견된 자료들은 불교 발생지인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 또는 일본의 석등 양식보다는 우리 나라의 석등 자료가 앞선 양식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은 다종다양하게 발달하여 근세 조선 시대까지 계승되어 왔다. 이들 석등은 한국 특유의 석탑에 비견할 만큼 독특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들의 양식과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석등은 석재 조명시설로서 인간이 자연 속에서 발견한 불을 관리하여 어둠을 밝히려는 욕망을 가진 데서 창안 개발된 기구인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주술적 영역에서 벗어나 신만이 만들 수 있다는 불을 스스로 관리하게 됨으로써 등은 인간문명의 상징이며 그 燈火는 신비적 관념에서 연유한 종교적 진리의 상징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즉 불교의 경전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의 진리인 광명은 암흑과 같은 사바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불신의 광명이 비치는 燈明으로 촌각도 지체없이 선한 지경으로 인도하는 선봉이 되고 있음을 밝혀 준다. 또한 불경의 구절에 따르면 탑이나 묘의 제 형상 앞에 등공양을 하거나 또는 임종시에 등화를 밝히면 삼십삼천에 다시 태어나 청정을 얻는다고 하였다. 화엄경에 의하면 등화 하나 하나가 수미산과 같을 뿐 아니라 한 종지의 등유인 기름은 큰 바닷물과 같아서 이는 모든 공양 중의 가장 으뜸 되는 법공양에 속한다고 하였다. 권세 있고 돈 많은 부자의 화려한 등불보다는 헐벗고 가난하나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난다(Nanda)의 등이 바로 불타의 진리를 묘사한다고 불경은 가르치고 있다. 또한 불타를 만들어 경영하는 사람이 부처님 앞에 새와 짐승을 던져 놓거나 부처님 앞에 시주한 돈을 단 한 닢이라도 손해를 끼친다면 그는 역리를 받아 아비지옥에 떨어져 돌아올 수 없으므로 이들 가운데 향유를 구하여 부처님께 등공양을 한 사람은 죄가 사해질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가 기독교나 기타 종교에 비해 등의 개념이 조명 이외에 교리적인 측면에서도 심오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2.석등의 기원 우리나라 석등의 기원에 관하여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석등의 유구가 발견된 장소는 불사와 능묘 및 그들의 유적지에만 국한되며 그 외 궁궐이나 택지의 유적에서는 등구가 발견되지 않았음은 주목된다. 한편 석등의 조성 연대는 능묘에서 발견된 석등보다는 대체로 종교적 예배지인 불사와 그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양식상 선행되는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불교 이전의 능묘에서는 아직 석등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 나라의 석등의 출현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기원을 종교적인 의식물의 필요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사에 따르면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 있어 지금까지 유존하는 석등은 단 3기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들 석등 양식은 우리 나라의 석등 양식과 매우 다른 점이 주목된다. 흔히 한국의 석등은 화창이 여러 곳에 개설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들은 단지 한 국면에만 국한되어 화창이 열려 있다. 한편 불교가 번성한 중국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석등은 유일하게 1기분의 석등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인도와 중국에 있어서는 희귀하게 석등 유적이 알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의 석등의 기원을 비교하여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단지 한국의 석등 기원과 발달을 불교의 전래와 양식상의 구분에 한정시켜 전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불상과 경문이 들어오고 곧 가람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등에 관한 지식의 전래를 추정하여 볼 수 있으나 확실한 근거, 즉 유물, 유적 또는 문헌을 찾을 수는 없다. 불교에 있어서 등구는 예배 의식에서 뺄 수 없는 기본적인 의식 도구일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 행하는 모든 공양 중 가장 으뜸 되는 법공양구인 三大要品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등구는 용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첫째는 이동이 가능한 소형의 생활 필수품으로서 실내외의 장치용으로 널리 이용되는 것이다. 둘째는 건축의 한 부속으로서의 옥외의 일정한 곳에 고정시켜 주로 야외용으로 전용된 대형등구로 구분된다. 특히 불가에서는 등구의 이용이 절대적으로 교리적인 의미에서 이용될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야간 활동과 산중의 가람이 맹수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도구로 이용되어 그 보급이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을 추정하게 된다. 그러나 초기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을 시기에 탑상의 초기자료가 석조에 앞서서 목조였던 것을 미루어 볼 때 등구 또한 목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목조가구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다분히 내포하면서도 실제로 이와 같은 유구와 유적은 우리 나라에서는 발견된 바가 없으므로 규명할 길이 없으나 일본에서는 2∼3기의 예가 문헌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목조등구와 유사한 것으로는 법주사 사적에 「연등각」이란 명칭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연등각이 어느 곳에 위치하였는지 알 수 없으며, 현재 이곳에는 4기의 석등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별도의 목조 등구 시설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까지 석조물로 알려진 유사한 형태의 석등은 발해의 동경성내의 한 사지에서 보여진다. 이 석등의 화사석은 목조건축 양식에 나타나는 장식을 갖추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와 같은 목조누각의 등구와 유사한 유형의 석등으로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남원 실상사백장암 석등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등의 실례를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석등자료로서는 6세기 즉 백제가 부여로 천도한 시기에 부여와 그 남방인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소재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비로소 시원적인 형태의 석등자료를 얻게 된다. 시원양식으로 추정되는 이들 석등의 유적이 발견된 미륵사지에서는 우리 나라의 최고 최대의 석탑이 유존되어 있어 석등의 조성의 연대를 석탑과 동일한 시기로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이 미륵사지의 석등자료는 완전하지 않는 3기분으로서 상대석 이상 부분은 지금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석등의 구조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석등은 시대적 구분에 따라 또한 용도나 미관에 따라 그리고 종교적 의미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 변천되고 있다. 그러나 양식상의 구별은 크게 불교적 성격과 유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불교적 성격에 의해 이룩된 석등은 가람 배치에 따라 불전 앞이나 탑, 부도 앞에 설치되는 종교적인 의식구로서 이는 佛燈 또는 懸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유교적 산물로 보이는 석등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민속적 성격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며 능묘 앞에 세워진 석등은 장명등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들 석조 양식은 시대 변천에 따라 점차 구조적인 표현 양식도 변화 발전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들 일반적인 석등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석등의 주요 부분은 등화를 일으키는 부분인 불집, 곧 火舍이며 이 火舍石을 주축으로 그 위에 지붕인 옥개 부분과 아래로 대좌부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들이 시대적으로 변천되어 온 것을 살펴보면 주부분인 화사석의 기본 평면은 초기에 팔각으로 사면에 화창이 설치되어 있으며 여면에는 화사벽으로 되어 있는 것이 기본형이다. 이 화사벽애 장식 및 조각상이 배치되든가,혹은 全面에 화창이 개설되는 경우도 보이고 있다. 때로 화사석의 기본 평면은 8각에서 변형되어 4각,6각,부등변8각 등으로 변화하여 시대적 구분을 가능하게 한다. 아울러 간주석에 있어서도 역시 八角型이 기본형이나, 시대가 지나면서 鼓復型,雙獅子型,單獅子型,人物像型, 六角型,四角型 등으로 변한다. 이같이 화사석,간주석 그리고 대좌석 등의 주요부분의 변화 양식은 이들 석등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석등의 양식적 분류의 주안점은 화사석에 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8각,6각,4각의 3가지 양식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하며 이를 시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팔각으로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해진 양식이며 통일신라시대에 특히 많이 제작되었다. 둘째는 육각으로 고려시대 전기에 일시 유행되었던 양식으로 화천 계성사지석등,회양 정양사석등과 같이 주로 강원도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각으로 고려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행되고 있는 형태다. 이상과 같이 대별할 수 있으나 모든 부재가 팔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전형양식이라 부른다. 전형양식 이외에 간주석의 형태에 따라 고복형양식,특이형 양식으로 세분할 수 있다.
4. 석등의 양식
(1 ) 전형 양식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고형식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유적의 창건 연대를 미루어 고찰하면, 삼국시대 백제말기 제30대 무왕(600-640) 시기에 창건된 미륵사지에서 한국 석등의 초기 양식을 찾게 된다(국립부여박물관 소장). 하대석에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방형 또는 원형의 평면을 취한 연화 하대를 안치하였는데 연판은 8엽의 단판으로 장식되었다. 간주석은 8각으로 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상대석의 경우는 팔각평면에 8엽 연화 단판을 장식하였으며 화사석 역시 8각 평면으로 조성되었으며 화창은 전후좌우에만 개설되었고 화창의 윤곽에는 빗장을 부착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옥개석은 평면 8각형으로 추녀 마루형을 이루고 있다. 이상 소개한 내용들 가운데 화사석의 형태가 여타의 한반도 각지에서 발굴된 자료와는 일치점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석등을 고형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것을 시원양식이라 칭하게끔 한다. 석등에서 전형양식이라 함은 삼국시대에 발생한 조형 양식에서 발전한 양식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전형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양식은 통일 신라시대 이후부터 발견되고 있다. 전형 양식은 경주를 중심으로 완성된 것으로 그 대표적인 석등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신라문화 전성기인 35대 경덕왕대부터 36대 혜공왕대에 걸쳐 조성된 경주 불국사석등을 시작으로 청도 운문사석등, 월성 원원사지석등, 대구 부인사지석등,보령성주사지석등,칠곡 송림사석등,부여 무량사석등,봉화 축서사석등 등으로 이어지는 제1양식이 있으며, 제2양식으로는 보은 법주사사천왕석등을 시작으로 합천 해인사석등,합천 백암사지석등,옥구 발산리석등,영주 부석사석등 등이 있다. 제2양식의 특징은 화사석에 화창을 개창하지 않은 여면에 보살상이나 사천왕상을 배치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종교적인 의의를 가진다. 이와 같이 전형 양식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장식성이 가미되는 새로운 양식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양식은 다름이 아니라 간주석의 변화로서 이는 고복형 양식이고 또 다른 양식은 이형 양식의 발달인 것이다. (2) 고복형 양식 고복형양식은 전형양식에서 불안정한 인상을 주는 간주석을 개량하여 안정감을 준 형태로 이는 외형상 長鼓型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대표적인 형태는 담양 개선사지석등,구례 화엄사석등,남원 실상사석등,임실 용암리석등,양양 선림원지석등,합천 청량사석등과 같이 주로 전라도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석등은 안정감을 주는 대신 전형 양식보다는 우둔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매우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다. 즉 裝飾燈의 성격을 취하고 있으며 이같은 양식의 발전은 교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살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지상과 천상간에 33천이 있으며 그 위에는 수미산이 있다고 한다. 그에 따라 화사는 수미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면 수미산과 지상 사이의 공간은 의당 간주석으로 받쳐지고 있는 셈이다. 지상에서 수미산을 받치고 있는 간주석은 )(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불경에 의하면 이 내곡된 부분의 주변에는 태양과 달이 운행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설명에 따라 조성된 석등이 고복형 간주석이며 이간주석 상하에 배치된 연화대는 각각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이 간주석의 중간에는 輪部가 배치되어 있는데 윤부의 앞뒤와 좌우의 사면에는 각각 四葉紋을 양각하여 태양과 달의 운행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 우주관을 표시한 고복형 양식은 전형 계통의 석등보다 규모가 크며 우리 나라 최대의 석등인 화엄사각황전 앞 석등과 임실 용암리석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석등이 갖는 실용성을 주목하여 보면 그 완전한 예로서 남원 실상사석등을 꼽을 수 있으며, 제작연대가 확실한 것으로는 담양 개선사지석등으로 이는 신라 48대 경문왕 8년때인 함통9년(868년)에 세웠음을 명문에 의해 알 수 있다.
(3) 이형양식
이형양식이라 함은 주부에 해당하는 간주석 대신 인물상이나 동물상으로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인물상으로 대치한 대표적 예로는 구례 화엄사사자삼층석탑 앞에 배치된 석등으로 이곳에 있는 인물상은 이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연기조사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연기 조사는 자신의 부모의 명복을 항상 빌기 위해 헌등하고자 자기 스스로 등을 머리에 이고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형양식의 하나인 사자석등은 쌍사자석등과 단사자석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쌍사자석등이 신라 후기에 출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단사자 석등보다 선행하는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쌍사자석등에 속하는 대표적인 예로는 통일신라시대의 법주사쌍사자석등, 증흥산성 쌍사자석등석등,영암사지쌍사자석등 등을 꼽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여주 고달사지쌍사자석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의 석등 가운데 양주 회암사지석등이 있다. 단사자석등으로는 조선시대 초기의 중원 청룡사지사자석등을 꼽을 수 있다. 불가의 조성물에 사자를 많이 애용하고 있는 이유는 사자가 용맹한 동물이므로 불가의 진리 전파를 수호하는 역을 맡는다는 생각에서 근거한다. 이형석등의 또 다른 양식은 운룡문 석등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원형의 간주석 석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석등을 살펴보면 화사석에 개설한 화창은 앞뒤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나 이전까지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타원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화사석의 여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낸다. 대표적인 경우가 전라북도 욕구 발산리석등이다. 이외에도 화사석의 평면부분으로 보아 6각형석등과 방형석등 등을 살펴볼 수 있다. 6각형석등은 화천 계성사지석등,원주 법천사지석등, 합천 해인사원당암석등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대체로 화사석이 6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간주석은 고복형에 속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특히 이 양식은 나말여초의 과도기에 잠시 나타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방형석등은 화사석이 방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뜻하며, 간주석은 고복형 계통이나 원주의 상중하 3개소에 고리를 설치하고 있다. 그 예로는 논산 관촉사석등,개성 현화사지석등을 들 수 있다. 이 석등의 특징은 상하대가 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화사석 부분은 4개의 방주가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이 옥개석 위에 다시 4개의 방주를 세우고 그 안쪽을 면석으로 메운 양식을 띠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석등은 주로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장명등, 다시 말해서 능묘 앞에 설치된 등을 볼 수 있다. 장명등이란 사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장명등에 관한 기원은 앞서의 문헌에서 본 바처럼 승려의 묘소인 부도앞에 등을 설치한 예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등장하게 된다. 이상 한국 석등의 양식 발달을 개괄적으로 밝혔다. 현재까지 조사된 석등의 수효는 270여 기에 달하며 그 중 약 90%에 해당하는 석등이 불교 관계의 석등이며 그 나머지만이 능묘용의 장명등에 속한다. 이로 인해 한국 불교 조형미술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석등을 세우게 된 동기와 이유는 불교 경전에서 밝힌 것처럼 불타의 진리는 불변의 진리며, 그 근본 또한 불멸이라는 데서 출발하여 등을 교리적 주체로 보아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사치스럽고 귀중품에 속하는 금이나 은보다는 소박 겸손한 재질을 지닌 목재, 석재가 이용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진리의 불변에 더욱 가까운 개념으로 변질이 쉬운 목재를 멀리 하고 화강암이라는 영구 불변의 소재를 택하게 되었다. 화강암을 사용함으로써 불타의 사상과 이념의 진면목을 꿰뚫어 본 한국인의 예지를 석등에서 쉽사리 찾게 된다. 조사자 : 김 병 락
진리의 빛, 석등
절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탑과 함께 서 있는 것이 석등이다. 어느 절에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대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라. 돌로 만들었지만 정성을 들인 이 등불은 불을 피우기에는 매우 과학적이니 구조로 되어 있으며, 하나 하나의 조각은 만들어진 시대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불교에서 이것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인도 조금만 생각하면 추측해 낼 수 있다.
1.1 빛에 담긴 의미 본래 석등은 중국 고대부터 무덤을 만들 때 비석 등과 함께 사용되었으나, 불교에서는 진리를 밝히는 지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져 여러 종류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석등은 부처를 상징하는 탑과 더불어 사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탑 앞에 세워졌던 석등은 나중에는 스님의 무덤인 부도 앞에도 세워지고, 이후 고려.wtjstleo에는 임금과 고위 관리의 무덤 앞에도 절의 석등과는 다소 다르지만 장명등이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1.2 석등의 형태
석등을 보면 적당한 높이에서 등불을 피워 빛을 발하도록 되어있다. 등불을 피우는 것으로는 가장 적당한 조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등에서 말하는 빛은 부처의 진리의 빛을 상징하고 있는 만큼 여러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8각형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국보17호) 석등의 구조는 부도와 비슷하나 더 단조로운 모습이며, 조각도 간편한 편이다. 석등은 기단부와 불을 켜는 모체 부분인 불집 그리고 그 위를 덮는 옥개석, 지붕돌 위에 올려지는 장식인 상륜부로 되어 있다. 기단부의 중심부분은 기둥같이 길게 되어 있어서 간주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석등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8각형 양식으로 이를 취한 것으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을 비롯하여 장흥 보림사 석등 그리고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 등이 대표적이다. 전체적으로 8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의 여덟가지 실천덕목인 팔정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라, 바르게 생각하라, 바르게 말하라, 바르게 행동하라, 바르게 생업을 유지하라, 바르게 수행하라, 바른 신념을 가져라, 마음을 바로 잡아라‘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석등은 크게 하대석-간주석-상대석의 대석부와 석등에서 핵심부로 등(燈)을 안치하는 화사석,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석등은 주로 팔각형으로 구서되어 있는데 간주석에 북이나 사자를 배치하여 장식적으로 건립하기도 한다. 또한 화사석은 불을 밝히는 곳으로 부처님의 광명이 비치는 곳이기 때문에 보살상이나 사천왕상과 같은 수호신상을 배치하기도 한다.
석등의 양식에서 팔각형은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유행하였으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다. 육각형 석등은 고려 초기에 일시 유행하였으며, 사각형 석등은 고려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유행되고 있다.
1.3 변형된 석등 간주석을 두 마리의 사자로 조각한 쌍사자석등은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과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지니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이 유명하다. 8각 기본형으로부터 완전히 변형된 특이한 모양의 석등도 있다. 여수 흥국사 석등은 하대석에 복련 대신에 거북이를 조각하여 놓았다. 고려시대에는 4각형의 석등이 나타나는데 논산 관촉사 석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찰이나 부도 앞에 석등이 많이 세워지지 않았다.
국내 최대의 2층 법당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는 크기에 걸맞은 석등이 있으니 높이가 6.4m나 됩니다. 통일신라 때 건립된 석등은 요즘 건물 2층 높이로 세계에서 가장 큽니다. 국보 제12호인데 이름은 그냥 '각황전 앞 석등'이랍니다.
글.그림=김영택(펜화가)
1.4 의상대사를 사랑한 선묘낭자 <영주 부석사 선묘각>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에는 의상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애절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 여인의 그림을 모신 조그만 건물이 무량수전 뒤편에서 답사객을 맞이하고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해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난 의상은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요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켰고 선묘는 불교에 귀의하여 의상이 뜻을 펼치는데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의상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한 옷가지 등을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안 선묘는 급히 부두로 달려가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옷상자를 던지니 상자가 물길을 따라 배에 닿았다. 그리고나서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의상이 탄배를 보호하는 용이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곳 보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뜻을 펼칠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이미 도둑의 무리들이 그 땅에 자리잡고 있었다. 선묘 용은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했다. 의상은 뜬바위가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고 절 이름을 부석사로 했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 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한다.
<영주 부석사-부석>
전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관인 황호균씨가 말하는 석등
절터의 잡초더미 속이나 천년고찰의 불전 앞마당에서 우뚝 솟은 석등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광주 개선사지 석등에서 '석등' 용어 등장 세상의 어둠 밝히려는 뜻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이며, 높이 6.36m에 달하고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예전에는 석등의 용도에 대해서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서만 해석하려했었다. 하지만 석등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실생활에 사용된 흔적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거의 대부분의 석등에서는 불을 밝히는 화창 주변 테두리에 여러 개의 홈이 패여 있었지만 그동안 주목 받지 못했다. 이 홈들은 바람에 등불이 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창틀 부착 흔적으로 판단된다.
황호균 <전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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