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수 기자 biochoi@msnet.co.kr
돌에 새 생명 선물…문화재 보수·복원·복제 산증인
박종병(61) 명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돌' 전문가이다. 40여 년을 돌과 함께해 온 그는 2003년 기능인 최고의 영예인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선정됐다. 석공예 명장은 석조물을 제작하는 장인을 말한다. 그의 손을 거쳐 보수'복원'복제된 문화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서 그는 '문화재 보수'복원'복제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섬세함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는 박 명장은 오늘도 돌에 숨(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서울 망우리에서 돌 만지는 기술 배워
박 명장은 세종시(옛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 후 동네 형의 권유로 돌 만지는 일에 발을 들여놓았다. "가난했던 집안 환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깎아서 만드는 일을 즐기는 등 손재주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것이 평생의 업이 됐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박 명장은 서울 망우리 석물 공장에서 일을 배웠다. 군(공병대) 복무 후 대구에 정착하면서 그의 손재주는 빛을 발한다. 1993년 전국기능대회 동메달을 시작으로 여러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입상했다. 그리고 석공예 기능사, 조경 기능사, 문화재 수리 자격까지 두루 갖춘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기능대회 심사위원, 기능대회에 출전할 선수 지도, 문화재 보수 등의 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그때부터 명장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박 명장의 손끝을 거치면 파괴되고 부서진 문화재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경주 남산 늠비봉 5층석탑, 창원 봉림사 부도탑, 다보탑 등이 박 명장의 손끝에서 복원되거나 복제된 문화재다. 최근에는 현풍초등학교 100주년 기념 조형물과 비슬산 대견사 금강계단(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곳)을 후배와 함께 작업했다. 그는 또 후배를 지도해 전국대회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기도 했으며, 문화재 지킴이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2003년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이 됐다. 박 명장은 "돌을 다루는 일은 힘들고 어렵다"고 했다. "상상력도 있어야 하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능력, 미적 감각, 돌을 다루는 기술, 체력 등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박 명장은 자신이 그저 돌이나 두드리고 다듬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정해진 틀을 따라 상품을 만드는 일이라면 지금까지 이 일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석공예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수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잘 만들면 문화재나 '명물'이 되지만 잘 못 만들면 '흉물'이 된다"고 했다.
◆컴퓨터 이용해 도면 설계
박 명장은 컴퓨터를 잘 다룬다. "286 도스부터 공부했으니 컴퓨터를 사용한 지는 꽤 오래됐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컴퓨터에는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메달, 감사'공로패, 각종 자격증 등 그동안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저장돼 있다. 그리고 작업에 필요한 각종 프로그램이 깔려 있다. 그는 컴퓨터로 설계하고 도면을 그린다.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3D 캐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설계도면을 작성한다. "돌 작업은 까딱 잘못하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컴퓨터로 작업해 시뮬레이션까지 해보면 공정상 미스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박 명장은 또 "주문하는 사람에게 도면부터 완성품까지 보여주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설득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완성 뒤 불만도 거의 없다"면서 "완성품도 미리 볼 수 있고 무엇보다 그리는 재미도 있다"고 했다.
작업하기 전 특별히 하는 의식이 있느냐는 질문에 박 명장은 "목욕재계 등 특별한 의식은 없고 제대로 하겠다는 마음가짐과 문화재에 대한 공부,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등으로 작업 과정에서의 실수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나에게 석공예란?
박 명장은 돌은 인간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고 했다. "나무나 종이로 된 문화재는 전쟁이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 파괴되거나 없어지지만 돌로 만든 것은 수천 년이 지나도 남아 있다"면서 "돌은 석기시대부터 인류와 함께해 왔다. 우리 생활의 모든 공정에는 돌이 많이 들어간다. 사람이 생활하는 곳 어디서든 돌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박 명장은 눈에 보이는 게 돌이지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돌은 따로 있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돌은 화강석으로, 서양의 대리석에 비해 작업하기가 훨씬 힘들다고 했다. "손기술은 우리가 단연 최고다.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하는 섬세함이 돋보인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고 했다.
박 명장은 사람들은 돌을 만지면 차다고 하지만 자신에겐 따뜻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리고 돌은 정직하다고도 했다. '쪼는 대로 형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과 마주하면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진다. 쪼는 그대로의 형상을 보여주는 돌인 만큼 돌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석조각을 위한 기계가 발달해 기계를 이용하면 훨씬 선명하고 세련된 문양을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기계로 만든 작품엔 정감이 없다고 했다. "작업이 끝나고 작품이 내 손을 떠나게 되면 다시는 고칠 수 없기에 작업하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완성된 작품은 수백 년이 될지 수천 년이 될지 계속 남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무는 불타서 없어질 수 있지만 돌은 몇천 년이 지나가도 남아 있다. 그래서 제가 만든 작품 흔적이 앞으로 어디에선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더욱 작품에 정성을 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시와 기술을 전수할 공간 필요
그는 자신이 겪었던 고난과 시련을 잘 알고 있기에 명장이 된 이후, 후계자 양성과 사회봉사활동에 남다른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기능공 양성을 위해 국가기능자격증 및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활동을 한다.
박 명장은 석공 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자들이 노동자 취급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우수한 우리 기술을 후대에 잘 전수할 수 있도록 정부가 석공에 대한 사회 편견을 없애는 일에 앞장서야 하고, 또 우수 기능인들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책 강화가 시급하다"고 했다. 박 명장은 "국가직무능력표준(NCS'한 개인이 산업현장에서 자신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직무능력, 즉 지식'기술'태도 등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도출해 표준화한 것)을 개발했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실제 현장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 매칭이 안 된다"며 "산업현장 교수로 그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평생을 돌과 함께 살아온 박 명장, 그는 "전시와 석공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
3D 설계 랜더링한 작품 노천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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