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량 한복을 입고 약속 장소에 나타난 석공예 명장 박종병(50)씨는 화실에서 방금 붓을 놓고 나온 사람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다소 느리고 차분한 말씨, 여유가 넘치는 행동…. 그에게서 석수(石手)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박 명장은 충청도 연기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방황하던 그는 당시 동네형의 돌작업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평생의 길이 됐다. 1974년 석공 일을 시작해, 서울 망우리에서 일을 배웠다. 망우리에서 일을 배웠다면 알만한 사람은 누구나 인정할만한 실력파다. 그리고 30년 세월이 지났고, 2003년엔 석공예 명장이 됐다. 전국에 순수 석공예 명장은 9명, 대구에는 박 명장이 유일하다.
발에 차이는 게 돌이지만 석공예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돌은 따로 있다. 동양의 석공들이 주로 쓰는 돌은 화강암, 서양에서는 대리석을 주로 쓴다. 특히 대형 작품은 화강암을 주로 쓰고 소품인 경우에는 대리석을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북 익산과 경남 거창에서 생산되는 돌이 석공예에 주로 쓰인다.
박 명장은 석공이 그저 돌을 쪼개고 다듬어 상품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정해진 틀을 따라 상품을 만드는 일이라면 여태 이 일에 매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석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수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반구대 암각화를 새긴 이름 모를 옛사람, 돌을 털어 그 안에 든 부처를 드러냈던 천년 전의 석수(石手)들이 그저 돌 깎는 기술자들은 아니지 않은가.
박 명장은 "구상력과 상상력, 미적감각과 기술, 몸의 힘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돌 다루는 일을 해낼 수 없다."고 했다. 중간에 석공일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워낙 힘이 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재능의 한계를 확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석공예에서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다른 업종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 일쑤지만 석공예 분야는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돌의 성질은 차갑고 정직하며 냉정하며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정성을 담는 대로, 따뜻함을 건네는 대로 받아 간직할 뿐이다. 돌은 석공의 마음과 태도를 감추거나 윤색하지 않고 그대로 담아 천년 세월을 넘어 후세에 전한다. 그래서 돌 앞에서는 명징한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박 명장이 돌과 함께 살아온 30여년 동안 만들어낸 작품은 많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경주남산 유적 정비사업, 다보탑 복제 등 문화재 복원 작업을 여러 차례 했다.
올해 4월엔 대구 현풍초등학교 개교 100주면 기념 조형물을 만들기도 했다. 노동문화재, 전국 기능대회 등에 직접 출전해 여러 차례 입상했고, 후배를 지도해 전국 대회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이밖에 크고 작은 전시회 개최도 60회가 넘고, 석공예 기능사, 문화재 수리기능자, 석조각, 직업전문교사면허 등 자격증도 수두룩하다. 또 1990년부터는 달성문화원에서 홍보부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족 모두가 용연사 석조계단(보물 제539호) 문화재 지킴이로 활동할만큼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깊다.
평생을 돌과 함께 살아온 박종병 명장. 그는 석조문화재를 한자리에 재현하여 선조들이 이룩한 찬란한 석조문화를 계승하고, 문화상품으로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작성일: 2006년 05월 10일
청암석조: 달성군 현풍읍 현풍서로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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